독일의 수도복귀와 세종시 행정 수도 이전의 비교는 넌센스다
독일의 수도복귀와 세종시 행정 수도 이전의 비교는 넌센스다
  • 박종혁 편집주간
  • 승인 2009.11.1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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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에게 정운찬 총리가 독일 수도 이전에 대하여 부정적 평가를 유도하는 질문을 했다. 행정 부처 이전의 효과를 물은 것이다. 당연히 슈뢰더 전 총리는 비효율적이라고 답했다. 질문 자체가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이었으니 만큼 질문자의 의도를 잘 모르는 슈뢰더 전 총리의의 답변 또한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부처간 분단이 10년 후에는 없어져, 본의 부처가 결국 모두 베를린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마무리 답변을 함으로써 슈뢰더 전 총리의 답변을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 총리의 의도는 다소 차질을 빚게 되었다.


독일의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복귀한 것과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연기공주로 이전하는 것은 그 취지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본에서 베를린으로 독일 수도를 옮긴 의의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베를린은 170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 후 1871년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245년간 독일의 수도였다. 독일이 분할되고 서독은 본을 분단국가의 수도로 삼았고, 동독은 2차대전 직후의 혼란기를 거쳐 1949년도에 베를린을 동독의 수도로 결정하였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1991년도에 수도를 베를린으로 복귀하였다. 245년간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으로의 통일 수도 복귀는 6000만 서독 주민의 염원이기도 하였다. 단순한 행정 부처의 분산 이전이 아니라 독일 제국 수도로의 복귀였던 것이다. 베를린으로 수도를 복귀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서독과 동독의 형식적 통일, 법적 통일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동독 주민과 서독 주민간의 실질적 내용적 통합을 보다 발전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통일 완성의 과정이었다. 서독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동독 주민들을 통일의 주역으로 배려하는 서독 정부와 주민들의 원숙하고도 넉넉한 배려기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덧붙이자면 베를린으로의 복귀 결정이 무리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로는 본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이 없었다는 데 있다. 독일은 아시다시피 지방 분권과 국토의 균형 발전이란 면에서 선진화를 이룬 나라이다. 수도 복귀를 결정한 1991년 당시 본의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으며, 베를린의 인구는 약 340만 명이었다. 한국과는 역사적 배경도 다르고, 주민들의 정치적 성숙도도 다르고, 기득권 세력들의 존재 형태나 규모도 다르며, 인구분포도도 현저히 다르다. 이러한 배경을 무시한 채 행정 부처의 분산에 초점을 맞춰 질문을 했다면 이는 한 마디로 우문이거나 계산이 깔린, 외교 결례에 가까운 주문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더구나 슈뢰더 전 총리가 “부처간 분단이 10년 후에는 없어져, 본의 부처가 결국 베를린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마무리 답변까지 참조하겠다고 한다면 사실상 세종시 원안 +α가 되는 것이니, 정운찬 총리의 우문에 대하여 슈뢰더 전 총리는 현답을 한 셈이 된다. 독일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통일독일의 동서통합 사회 통합을 추구한 독일, 독일국민들에게 지난 10여 년의 행정 부처의 분산은 지엽적인 문제였으며 이 시기는 결코 인내할 수 없는 비효율의 긴 시기가 아니었다. 이러한 담대한 통합은 10년 후 베를린으로 전 행정부처를 이전시킴으로서 독일 역사의 큰 획을 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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