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건 一幕]징기즈칸과 티무르의 무소유 본능
[토건 一幕]징기즈칸과 티무르의 무소유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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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2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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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즈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와 성을 점령하였으나 한 번도 그 성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성 안에서 살지도 않았다. 그는 초원의 유목민이었다. 유목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가축을 따라 끝없이 이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니, 유목과 전쟁에 필요한 최소한의 휴대품 이외에는 그 어떠한 재물도 유목생활에 지장을 주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즈칸이 되었다”
위의 구절은 징기즈칸이 남긴 어록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는 몽골 부족을 통일시킨 후,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법을 선포하였다. 동서양을 통털어 최초로 공화주의제를 실현시킨 것이다.
징기스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들러싸여 70세의 생을 마감했다.

몽골제국의 뒤를 이어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티무르가 나타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며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아시아에서 가장 웅대하고 화려한 도시로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대형 모스크의 돔 등,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들은 티무르 제국의 영광과 강대함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티무르 역시 이 성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사마르칸트에서 살지도 않았다.

가끔씩 사마르칸트 시와 성을 방문하기는 하였으나 머무르는 기간은 수일을 넘기지 않았다.
티무르는 죽을 때까지 사마르칸트 건너편에 있는 초원 위의 야영 천막에서 살았다. 징기즈칸이나 티무르에게 무소유는 본능이었다. 법 앞의 평등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은 학문과 과학을 중흥시킨 정치철학이었다.

최근 국가 권익위원회를 필두로 하여 업계마다 청렴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국가와 민간단체를 망라하여 청렴이라는 과제는 수천년간 꼬리를 물고 이어내려온 미결 과제이다. 위에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 중국 속언도 있지 않은가. 더구나 문명사회의 건설과 더불어 인류에게는 쉽게 퇴화되지 않는 욕망이라는 유전자가 영혼의 일부로 뿌리를 내렸다.

이 유전자는 다운계약서 총리와 위장전입의 검창총장을 피해가지 않았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법 앞의 평등함을 솔선하여 실행하고 무소유의 본능까지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수양과 철학으로 거듭 무장한다면, 공무원들과 국민들은 자발적인 단결과 규율로 호응한다. 이것이 청렴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지는 법이다. 위에서 구정물을 튀기면, 권익위원장이 민간 업계 관계자들을 소집하여 아무리 장시간 군기 잡듯이 훈계와 엄포를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뒷줄에 앉아 있는 청중들은 하품으로 응답하며 대책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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